일상다반사 심리 연구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다.)

moon리버 2025. 3. 12. 17:48

나는 매일 등산을 한다. 남한산성까지 오르는 길은 여러 개다. 등산을 한 지도 거의 4년이 다 되어가니 이 길도 가 보았다가 저 길도 가 보았다가 한다.

 늦은 겨울에 내린 눈으로 산으로 가는 대부분의 길이 빙판이 되어서 아이젠을 해도 산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마침 등산 길에 매일 마주치던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다가 내려오는 길이 대부분 계단으로 되어 있는 길이 있다고 해서 처음 시도를 해 보았다.

중간에 몇 군데 미끄러운 부분을 빼 놓고는 아주머니 말씀대로다. 거의 달리듯이 눈이 없는 계단을 순식간에 내려왔다.

다음날도 산에 왔다. 날씨는 계속 추웠고 빙판길은 그대로 일 것 같았다. 어제 하행할 때의 그 계단 길이 나을 것 같아 그 방향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군데군데 빙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단에는 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워낙 등산으로 다져져 있는 다리 근육이라 많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속도를 내본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복병이 있었다. 어느정도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새로운 계단 형태로 바뀌면서 계단과 계단 사이가 막혀져 있지 않고 뚫려 있다. 땅과의 거리도 꽤 있어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등산에 속도를 붙이다가 이내 속도가 줄었다. 한걸음 한걸음을 내 딛는 것이 망설여 졌다. 아랫배가 싸늘해지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은 기분은 내가 공포감을 느끼는 높이에 와 있을 때 몸이 반응하는 방식이다.

분명 어제 산을 내려올 때는 그 부분이 뚫려 있는지도 몰랐다. 왜냐면 내려가는 길에는 뚫려 있는 부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는 그렇게 튼튼해 보였던 계단이 올라가는 길에 땅과의 거리를 보니 내가 조금이라도 세게 걷다가 혹시 무너지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계단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지어진 지 십년도 더 되었고 또한 셀 수도 없이 많은 등산객들이 다니던 계단이다. 그리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뚫려 있던 것을 모르던 나는 바로 어제 그 길을 달리 듯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내려왔다. 어제의 그 계단과 오늘의 이 계단은 같은 계단이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래도 여기서 떨어지면 어쩌지, 계단이 무너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하행길에 보이는 계단의 모습
등산길에 보이는 계단의 모습

문득 이 모습은 참 익숙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이성적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거기까지 생각을 끌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평소 나의 모습이다. 걱정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해외의 속담도 있지만 나의 머릿속 온갖 생각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걱정은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두려움이 되고 걱정이 된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옛 속담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마치 내가 내려가고 또 올라갔던 그 계단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그 사실이 과연 진실일지 혹은 아주 일부분일지를. 내가 살아온 세월이 아주 길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직간접 경험으로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사실은 그와 관련된 아주 극히 일부분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눈으로 보고 판단된 하나의 조작된 사실일 뿐이다. 그 진실 혹은 진리라고 믿어지는 것들은 내가 만든 나의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세상에서는 그것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 또 어떤 사실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고민 그리고 그에 대해 내리려고 하는 결정을 잠시 유보해도 되는 이유는 이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해석이 되고 고민이 되고 하는 일도 아주 한참이 지난 후에 돌아보면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된다.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던 일도 오랜 후에 다시 생각을 짚어보면 고민의 여지가 없는 아주 선명한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 그것이 나에게 보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나에게 지금 보이는 일을 붙들고 고민을 하고 결정을 하겠지만 그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보다는 조금은 더 가볍게 인생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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